고려대장경 이야기

고려대장경 이야기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알려주는 고려대장경 이야기

고려팔만대장경이란
I. 대장경(大藏經)이란?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 을 대장경이라 합니다.
여기에는 경장(經藏), 율장(律藏), 론장(論藏) 즉 삼장(三藏)이 포함되 어 있습니다.
삼장(Tri Pitaka); 경장(Sutra Pitaka), 율장(Vinaya Pitaka), 론장(Abhidarma Pitaka)

경장: 부처님께서 설하신 근본교리(根本敎理)

율장: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제자들이 지켜야할 윤리(倫理)의 조항과 공 동 생활상의 규범(規範)

론장: 위의"경"과 "율"에 대해 스님이나 학자들이 설명론의(說明論議) 한 것

Ⅱ. "고려대장경" 혹은 "팔만대장경"이란 명칭?
대장경이 우리나라 역사상 고려시대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 이라 하고 조성된 경판수가 팔만장 이상 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하며
또 모아서 "고려팔만대장경"이라 하며 그리고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기에 "해인사 팔만대장경" 혹 은 "해인사 고려대장경"이라 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팔만"이라는 의미?
불교에서는 "팔만 혹은 팔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많다"라는 의미를 내포 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간의 번뇌가 많음을 들어
"팔만사천번뇌"라 이르고 부처님의 많 은 가르침을 들어 "팔만사천법문"이라 이름합니다.
중생들에게 팔만사천 번뇌(병)가 있기에 부처님께서 이를 치유하기 위해 서 팔만사천 법문(약)을 설하셨습니다.
Ⅲ. 대장경(판) 조성의 역사
1) 최초의 대장경 목록 탄생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를 전하는 구법(求法)승들의 최대의 관심 사는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이었으며
이런 역경 사업엔 大·小왕조의 지배자들이 앞 다투어 후원하고 추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부처님의 경전을 잘 모시고 번역하면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왕조와 나라가 번영하고 백성이 평안하고 자연재해가 적어지고
오랑 캐를 물리칠 수 있다는 부처님 가피력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였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런 역경사업이 산발적으로, 대규모적으로 이루어 지다보니 많은 한역 경전이 나오게 되니 자연히 경전의
내용별 先·後분류가 이루어져야할 필요성을 느끼 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730년(開元 18年)에 지승(智昇)스님이 경전을 내용별로 잘 분류하여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이라는
최초의 대장경 목록 책을 펴내었습니 다.
2) 최초의 대장경 경판 조성
이때까지만 해도 불경은 모두 붓으로 직접 쓴 사본(寫本)이었는데 전란이 나 불교를 배척하는 세력가들에 의해 경전이 소실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고 불경을 돌이나 나무에 새겨서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믿음과 함께 대장경 조판 을 통해 호법·호국의 신앙이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역사상 경전을 나무에 판각한 최초의 대장경판은 "북송관판대장경(北宋 官版大藏經)" (972년 시작~983년에 완성)입니다.
이 대장경판은 대장경 목록 "개원석교록"을 바탕으로 북송 태조의 칙명으 로 만(滿) 11년만에 완성되었으며
모두 13만 매 정도로 차례는 千字文순으로 480함 (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북방 오랑캐 金나라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습니다.
Ⅳ. 우리나라에서 대장경판 조성의 역사
1) 초조 고려대장경
최초의 대장경판 조성은 고려 현종 2년(1011년)때 시작하여 현종20년 (1029년) 18년 만에 완성한 "초조 고려대장경"(初雕 高麗大藏經)으로
대체로 북송의 관판대장경의 내용을 토대로 조성하였으며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해 놓았는데 불 행하게도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습니다.
초조 대장경판 보완 및 고려 속장경의 제작과 함께 고려인은 북송 대장경을 토대로 조성한 초조 고려대장경에 만족하지 않고 완벽하고 주체적인 대장경을
만들려고 원대한 뜻을 품고 고려 문종때 초조대장경의 보완과 더불어 대각국사 의천(義天) 스님은 흥왕사에서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불교 역사상 최초의 창조적 대장경 조성 사업 에 착수하였는데 멀리 송나라, 요(遼)나라와 일본국까지 경전을 조사하고 모집해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는 책을 출간하였으며 이것이 이른바 고려 속장경(續藏經)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북방 외적의 병화로 소실되었으며 국내 및 일본등지에 남아 있는 영인본을 통해서 그 탁월한 창조적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2) 재조(再雕) 대장경판 조성(현존하는 해인사 고려대장경)
현재 해인사 고려대장경은 고려 고종23년(1236년)에 시작하여 고종 38년 (1251년)까지 16년간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강화도 선원사에는 장경도감을, 진주등지에는 분사를 두어서 판각하였으며 처음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봉안하였다가 외구의 노략질이 심해서
더욱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서울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1398년에 해인사로 옮겨서 기금 까지 안전하게 봉안하고 있습니다.
Ⅴ. 고려대장경 경판 판각 동기(護國, 護民, 護法)
중국에도 그러했듯이 그 당시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도 불경(대장경)을 잘 모시고 판각하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에 의해서 왕조가 유구하고
나라가 평 화롭고 국민이 평안해진다는 숭고하고 가륵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려인들의 이러한 확실한 믿음으로 인하여 어려운 전쟁중에도 고려의 온 국민들은 일치 단결하여 이 엄청나고 불가사의한 팔만대장경 판각을 이룩하였습니다.
다시 간추려 말하면 대장경 판각 동기는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護國), 국민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護民),
불법을 보호하기 위해서(護法)"입니다.
그 당시 대장경판의 조성을 위한 고려 군·민(君·民) 의 간절한 염원과 뜻은 1237년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Ⅵ.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국보적 가치
①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은 현존하는 대장경판 중 최고(最古)의 것이며, 여러 차례 교감(校勘)을 거친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경판입니다.

최근 일본이 자랑하며 만든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책도 거의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기초로 하여 교감(校勘) 되었습니다

②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은 다른 나라(송나라, 금나라, 거란 등)의 대장 경판의 내용을 아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현존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앞으로 대장경을 제작시 대장경 원본(原本)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 니고 있습니다.

③ 내용에 있어서도 역사상 다른 대장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문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함중(各函中)에도 보이며 특히 "제"함이하("濟"函以下)에 있음.

④ 경판 글자 하나하나가 매우 정교하고 모두 일률적입니다.

현존하는 각판 문화재(刻板文化財)중 최상의 보물이며, 예술성이 뛰어납니다.

Ⅶ.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개요

해인사 고려대장경 경판은 국보(國寶) 제 32호 임(國寶로 지정된 연도 : 1934년 8월 27일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에서 국보로 지정한 것을 우리정부 수립후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정부가 다시 지정 하였음)

1) 총매수

81,258매 <양면에 해서(楷書)로 양각되었음>

경종류 : 1,514종 권수 : 6,802권 ․

* 각종 자료마다 경판의 총매수, 경종류, 권수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 補遺板포함여부""중복판포함여부"등으로 인하여 차이가 생겨납니다.
※ 위의 수치는 가장 보편적이고 신빙성있는 통계자료입니다.
2) 경판 1매

가로길이 ≒ 70cm 무게 ≒ 3.250

세로길이 ≒ 24cm 두께 ≒ 2.8cm (글자 새겨진면 : 가로길이 ≒ 51cm 세로길이 ≒ 22cm)

글자행수 ≒ 23줄

1행당 字수 ≒ 14字

1字 크기는 ≒ 방 5분(方五分)

3) 경판 1매당 글자수(字數)

23(행수) x 14(1행당 자수) x 2(양면) ≒ 644字

4) 경판 전체 글자수

644(경판 1매당 글자수) x 81,258(총 경판수) ≒ 52,330,152字

5) 경판 나무종류(자작나무, 산벚나무, 돌배나무)

재질단단, 오래보존

6) 판각하기 전에 경판나무를 끓는 소금물에 담굼 ~ 그늘에 말림 반복

뒤틀림 방지, 좀 방지, 오래보존

7) 경판 표면에 옻칠

좀 방지, 오래보존

8) 경판 옆면에 마구리 설치

뒤틀림 방지, 쪼갬방지, 오래보존

9) 네 모퉁이에 동판(銅版)부착

마구리 보호, 오래보존